지난달 초 중앙대학교 소속 A 교수가 제자들의 연구 결과물과 논문을 가로채 해임 처분을 받았다. 대학가에서는 "언젠가 분명히 터질 일이었다"며 자조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양적 지표에 편중된 국내 대학들의 연구업적 평가 탓에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SCI·SCIE·SSCI 등 국제학술지 게재 중심의 논문 평가가 지속된다면 장기적으로 대학사회의 연구 수준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국내대학들, 논문 수·국제학술지 게재 중심 평가
28일 대학가에 따르면 국내 대학들은 교수의 승진 및 재임용 심사를 위한 연구업적 평가 시 국제학술지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게재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B 사립대의 '교원 연구업적 평가' 중 학술논문 부문을 보면 국제저명학술지 게재 점수는 80점으로 기타학술지(30점)보다 2.6배 높았다. 또 법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계열에서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를 직위승진을 위한 최소 기준으로 요구하고 있다. C 사립대는 교원의 연구업적을 평가할 때 △국제저명학술지 200점 △국제전문학술지 150점 △국내저명학술지 130점 △국내전문학술지 100점 등으로 논문 게재 점수를 세분화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 국내 대학들은 작성 논문 수, 국제학술지 게재 실적 등을 중심으로 교수의 연구업적을 평가한다. 반면 논문에 담긴 연구내용의 질적 수준은 평가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
◇'양'보다 '질' 중시하는 해외대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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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학들과 달리 미국·유럽·일본 등 해외 대학들은 양보다 질에 초점을 둔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미국 콜롬비아대는 평가 대상의 논문·수상실적·연구비 기여도 등으로 학문적 영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외부의 인지도 있는 전문가의 평가서'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위스콘신대처럼 외부평가를 통해 질적 수준을 심층적으로 판단하는 대학들도 상당수다.
유럽 대학들은 동료 및 외부평가를 통해 연구중요도 및 질적 수준에 대한 학계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외부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지원금을 조달했는지도 주요 평가지표 중 하나다. 특히 질적 수준에 대한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은 평가 결과를 좌우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논문 수 및 학술지 게재 실적 등 양적 지표를 평가에 반영하는 해외 대학들도 있지만, 반영 비중은 낮은 편이다. 일본 대학들은 양적 지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질적 수준만으로 연구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학문생태계 붕괴 우려"… 각종 부작용 발생
연구업적 평가가 양적 지표만으로 이뤄지면서 대학사회의 연구 역시 특정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이정재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은 "학문 특성상 많은 논문이 나오는 분야가 있는 반면 1년에 논문 1편도 내놓기 어려운 분야도 있다"며 "단순히 논문 수로만 평가한다면 논문 쓰기 쉬운 분야로 인재가 몰리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협의회장은 "결국 논문이 잘 나오는 분야의 연구만 집중돼 학문생태계가 붕괴될 것"이라며 "현재 경쟁적으로 논문 실적 중심으로 인재를 채용하고 있는 지방대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앙대의 한 교수는 "국내 대학들이 앞다퉈 국제학술지 중심 평가를 강화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교 마케팅 때문"이라며 "국내 대학의 경우 해외 시장에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어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여러 번 등재됐다고 홍보하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 실적을 올리기 위해 대학원생 제자를 학문적으로 착취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며 "본인이 작성한 논문을 자기표절하는 경우도 크게 늘고 있다"고 털어놨다.
◇"분야별 '질 평가 시스템 및 학회 평가 도입해야"
질에 초점을 둔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학문계열 및 연구분야별 평가협의체를 마련해야 한다는 게 교수들의 의견이다. 특히 단순히 국제학술지 게재 건수로만 평가할 게 아니라 학문계열별 평균 논문 수 등 기준을 활용한 상대평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전길자 이화여대 교수협의회장은 "자체적으로 질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며 "단순히 얼마나 많은 논문을 썼는지가 아니라 연구의 질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재 협의회장은 "산업과 연관된 연구를 촉진시키려면 연구지원금 수주 실적에 대한 평가 비중을 높여야 한다"며 "특히 이공계열의 경우 실질적 연구를 유도할 수 있는 질적 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주요 사립대의 한 교수는 "국내 교수들 사이에서는 동료 및 외부 평가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며 "분야별 상대평가 또는 학회를 통해 논문의 양보다 질을 따지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