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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박물관 문화강좌
박물관 | 2005-09-08 | 조회 1457
본문 내용
제25회 박물관 문화강좌가 아래와 같이 열립니다. 학우여러분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주제 : 광개토대왕 비문의 진실
강사 : 김병기(전북대학교 동양어문학부 교수)
일시 : 2005년 9월 13일(화) 14:00~16:00
장소 : 진수당 2층 일반회의실 Ⅱ
내용..
광개토대왕비는 오랜 풍상 속에서 세 번의 죽음을 맞았다. 첫 번째 죽음은 부끄럽게도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것이다. 1,000여 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광개토대왕비가 사라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반쪽’만의 통일을 이룩한 통일신라에 의해 고구려의 역사서가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광은 정식으로 쓴 사서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광개토대왕비도 그렇게 잊혀져갔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유일한 정사(正史)로 꼽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 작) 〈고구려본기〉를 보면 광개토대왕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백제와 싸워 항복을 받았다는 언급도, 신라를 침입한 왜와 가야의 대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요동과 만주를 놓고 중국이나 주변의 유목 민족과 자주 싸웠다는 언급이 전부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사서가 고구려를 인식하는 수준이 이러하였으니 광개토대왕비는 아마도 최소한 고려시대 이후부터 벌써 그 존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만 것 같다. 비록 압록강 중류 북쪽에 거대한 석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에도 전해져 오기는 했으나 그것이 광개토대왕비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북방의 어느 족속이 세운 나라의 왕 능비일 것이라는 추측과 짐작만 하고 말았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주를 호령했던 조상들이 남긴 자랑스러운 역사적 증거를 스스로 잘 거두지 못한 채 망각 속에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가 맞은 두 번째 죽음은 일제의 소행에 기인한다. 일제 강점기 즉 항일 시대에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훔치고 망가뜨리려고 혈안이 되었었다. 당시 그들은 조선만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하여 4~5세기 경에 한반도에 일본 정부가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웃지도 못할 설을 들고 나와 먼 역사 속의 백제와 신라마저도 빼앗아 갔다. 그리고선 우리에게 이런 식의 강변을 늘어놓았다.
“이미 4세기로부터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일본의 신민(臣民:신하 백성)이었다. 당시에 벌써 조선반도는 일본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다시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원래 일본 땅이었던 땅이 다시 일본 땅이 되고 원래 일본 백성이었던 백성이 다시 일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니 조선 백성들은 한일합병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일제는 광개토대왕비를 근거로 내놓았다. 그리고선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봐라!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비문을. 여기에 분명히 이렇게 씌어 있지 않느냐? ‘서기 391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말이다.”
엄청난 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근거자료라며 내놓은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제시한 탁본은 분명히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었고 그 탁본에는 분명히 ‘서기 391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그들 -백제와 신라를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쓰여 있었으니 말이다. 너무나도 억울한 우리는 광개토대왕비 비문의 문장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며 새로운 해석 방법을 제시했으나 전혀 말이 먹히지 않았다. 문법적으로 너무 무리한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역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가 일본의 신민이었다는 점을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두 번씩이나 죽음을 맞았던 광개토대왕비가 최근 다시 죽음을 맞고 있다. 중국이 지금 세 번째 죽임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7월 1일, 중국 소주(蘇州)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위원회(WHC) 제28차 회의에서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과 함께 중국에서 신청한 ‘고구려 수도, 귀족과 왕족의 무덤’을 동시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였다. 엄연히 우리의 문화유산인 고구려의 수도와 거기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 우리가 아닌 중국의 신청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우리가 아닌 중국에 의해 등재되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나 우리의 문화유산이 등재 되었다는 점만 본다면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아낀 나머지 유네스코에 등재까지 해준 중국의 갸륵한 정성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법도 하다. 그러나 중국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인민일보(人民日報)》와 《신화통신(新華通信)》 등 중국의 관영 언론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고구려의 유적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고구려는 중국 고대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인민일보는 “기원전 37년에 부여 사람인 주몽이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縣)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한나라 당나라 시기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고 보도하였다. 신화통신은 “고구려는 역대 중국 왕조와 예속관계를 맺어 왔으며 중원(中原) 왕조의 제약과 관할을 받은 지방 정권”이라면서 “고구려는 정치,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중원 왕조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신화통신은 특히 “고구려가 민족적 특색을 지닌 문화를 창조했으나 중기 이후에는 중원 문화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다”면서 “견고한 산성, 웅장한 능묘, 휘황찬란한 고분 벽화는 중국문화의 주요 구성 성분”이라고 강조하였다. 인민일보나 신화통신 외에 대부분의 중국 언론들은 북한의 신청에 의해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조차도 하지 않거나 기사 말미에 짧게 취급했다. 정말 어이없는 보도가 아닐 수 없다. 엄연한 독립국으로서 만주 벌판은 물론 중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던 고구려를 중국에 예속된 동북 지방의 소수민족 국가로 규정하고자 하는 중국 정부의 의도를 볼 수 있는 보도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간에 일본이 저지른 심각한 수준의 역사 왜곡에 직면하고서도 항의만 했을 뿐 결과적으로는 하나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료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역사를 왜곡하는 망언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부딪치게 되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호시탐탐 역사를 훔칠 생각을 하고 있고 중국은 중국대로 이른 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적인 사업으로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발해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것 같지만 사실상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자칫 우리의 조상들이 이룩하고 가꾸어온 역사를 대폭 축소 당하거나 심지어는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만약 그렇게 역사를 빼앗긴다면 그 빼앗긴 역사로 인하여 현재의 한반도 영토마저도 제대로 보전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역사를 빼앗기는 일은 조상의 얼과 민족의 혼을 빼앗기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역사를 가꾸지 못하고 역사의 주인 자리를 남에게 내준 통한의 세월이 있다. 항일시기 35년이 바로 그것이다. 그 35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게 너무나 많다. 몸도 잃었고 재물도 잃었고 특히 우리의 정신은 처참하게 손상당했다. 지금 나라를 되찾은 지 6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 때 입은 정신적 손상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일제잔재의 청산을 골간으로 하는 ‘과거사 정리법’이라는 희한한 법을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상존하고 있는데 그 법의 제정을 두고 국론이 갈리고 상호 비방과 투쟁을 계속하는 참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역사를 빼앗긴다는 것이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히는 줄을 현실을 통하여 절실하게 통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다시 또 역사를 빼앗기는 일을 당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 할 때이다. 경제적인 어려움만이 어려움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은 역사를 왜곡당하고 빼앗기는 시련이다. 역사를 잃어버리고 나면 ‘나’ 혹은 ‘우리’라고 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정치’, ‘우리 경제’, ‘우리 문화’라는 말이 더 이상 존재해야 할 공간도 없어지고 이유도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광개토대왕비를 구해내야 한다.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한․일간에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는 독도 문제에서 보듯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손을 놓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혹자는 “모든 역사는 승자(勝者)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다. 일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변조함으로써 광개토대왕과 그 비를 처참하게 죽이고 말았다. 이제 광개토대왕비를 살려내어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광개토대왕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세월 속에 묻혀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우리는 거족적으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획일화된 ‘국민교육’을 부활하자거나 그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민족만 보고 세계는 보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보아야 할 것, 알아야할 것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자는 얘기다. 역사에 관한 한 ‘국민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 수상은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 왜곡 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라고 역사 교육을 강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일제가, 그리고 현재의 일본 사학계가 여전히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기록이라며 제시하고 있는 기록의 일부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비문을 변조하고 변조된 비문을 토대로 유포한 날조의 기록이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게 교활하게 비문을 변조할 줄을. 그러나 일본은 변조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은폐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사학계는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이 싸움이니 100년이 넘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비 비문 변조에 얽힌 이 역사의 전쟁을 일러 흔히 ‘100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주제 : 광개토대왕 비문의 진실
강사 : 김병기(전북대학교 동양어문학부 교수)
일시 : 2005년 9월 13일(화) 14:00~16:00
장소 : 진수당 2층 일반회의실 Ⅱ
내용..
광개토대왕비는 오랜 풍상 속에서 세 번의 죽음을 맞았다. 첫 번째 죽음은 부끄럽게도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것이다. 1,000여 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광개토대왕비가 사라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반쪽’만의 통일을 이룩한 통일신라에 의해 고구려의 역사서가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광은 정식으로 쓴 사서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광개토대왕비도 그렇게 잊혀져갔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유일한 정사(正史)로 꼽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 작) 〈고구려본기〉를 보면 광개토대왕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백제와 싸워 항복을 받았다는 언급도, 신라를 침입한 왜와 가야의 대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요동과 만주를 놓고 중국이나 주변의 유목 민족과 자주 싸웠다는 언급이 전부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사서가 고구려를 인식하는 수준이 이러하였으니 광개토대왕비는 아마도 최소한 고려시대 이후부터 벌써 그 존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만 것 같다. 비록 압록강 중류 북쪽에 거대한 석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에도 전해져 오기는 했으나 그것이 광개토대왕비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북방의 어느 족속이 세운 나라의 왕 능비일 것이라는 추측과 짐작만 하고 말았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주를 호령했던 조상들이 남긴 자랑스러운 역사적 증거를 스스로 잘 거두지 못한 채 망각 속에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가 맞은 두 번째 죽음은 일제의 소행에 기인한다. 일제 강점기 즉 항일 시대에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훔치고 망가뜨리려고 혈안이 되었었다. 당시 그들은 조선만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하여 4~5세기 경에 한반도에 일본 정부가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웃지도 못할 설을 들고 나와 먼 역사 속의 백제와 신라마저도 빼앗아 갔다. 그리고선 우리에게 이런 식의 강변을 늘어놓았다.
“이미 4세기로부터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일본의 신민(臣民:신하 백성)이었다. 당시에 벌써 조선반도는 일본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다시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원래 일본 땅이었던 땅이 다시 일본 땅이 되고 원래 일본 백성이었던 백성이 다시 일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니 조선 백성들은 한일합병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일제는 광개토대왕비를 근거로 내놓았다. 그리고선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봐라!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비문을. 여기에 분명히 이렇게 씌어 있지 않느냐? ‘서기 391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말이다.”
엄청난 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근거자료라며 내놓은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제시한 탁본은 분명히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었고 그 탁본에는 분명히 ‘서기 391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그들 -백제와 신라를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쓰여 있었으니 말이다. 너무나도 억울한 우리는 광개토대왕비 비문의 문장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며 새로운 해석 방법을 제시했으나 전혀 말이 먹히지 않았다. 문법적으로 너무 무리한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역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가 일본의 신민이었다는 점을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두 번씩이나 죽음을 맞았던 광개토대왕비가 최근 다시 죽음을 맞고 있다. 중국이 지금 세 번째 죽임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7월 1일, 중국 소주(蘇州)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위원회(WHC) 제28차 회의에서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과 함께 중국에서 신청한 ‘고구려 수도, 귀족과 왕족의 무덤’을 동시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였다. 엄연히 우리의 문화유산인 고구려의 수도와 거기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 우리가 아닌 중국의 신청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우리가 아닌 중국에 의해 등재되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나 우리의 문화유산이 등재 되었다는 점만 본다면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아낀 나머지 유네스코에 등재까지 해준 중국의 갸륵한 정성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법도 하다. 그러나 중국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인민일보(人民日報)》와 《신화통신(新華通信)》 등 중국의 관영 언론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고구려의 유적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고구려는 중국 고대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인민일보는 “기원전 37년에 부여 사람인 주몽이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縣)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한나라 당나라 시기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고 보도하였다. 신화통신은 “고구려는 역대 중국 왕조와 예속관계를 맺어 왔으며 중원(中原) 왕조의 제약과 관할을 받은 지방 정권”이라면서 “고구려는 정치,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중원 왕조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신화통신은 특히 “고구려가 민족적 특색을 지닌 문화를 창조했으나 중기 이후에는 중원 문화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다”면서 “견고한 산성, 웅장한 능묘, 휘황찬란한 고분 벽화는 중국문화의 주요 구성 성분”이라고 강조하였다. 인민일보나 신화통신 외에 대부분의 중국 언론들은 북한의 신청에 의해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조차도 하지 않거나 기사 말미에 짧게 취급했다. 정말 어이없는 보도가 아닐 수 없다. 엄연한 독립국으로서 만주 벌판은 물론 중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던 고구려를 중국에 예속된 동북 지방의 소수민족 국가로 규정하고자 하는 중국 정부의 의도를 볼 수 있는 보도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간에 일본이 저지른 심각한 수준의 역사 왜곡에 직면하고서도 항의만 했을 뿐 결과적으로는 하나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료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역사를 왜곡하는 망언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부딪치게 되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호시탐탐 역사를 훔칠 생각을 하고 있고 중국은 중국대로 이른 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적인 사업으로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발해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것 같지만 사실상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자칫 우리의 조상들이 이룩하고 가꾸어온 역사를 대폭 축소 당하거나 심지어는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만약 그렇게 역사를 빼앗긴다면 그 빼앗긴 역사로 인하여 현재의 한반도 영토마저도 제대로 보전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역사를 빼앗기는 일은 조상의 얼과 민족의 혼을 빼앗기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역사를 가꾸지 못하고 역사의 주인 자리를 남에게 내준 통한의 세월이 있다. 항일시기 35년이 바로 그것이다. 그 35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게 너무나 많다. 몸도 잃었고 재물도 잃었고 특히 우리의 정신은 처참하게 손상당했다. 지금 나라를 되찾은 지 6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 때 입은 정신적 손상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일제잔재의 청산을 골간으로 하는 ‘과거사 정리법’이라는 희한한 법을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상존하고 있는데 그 법의 제정을 두고 국론이 갈리고 상호 비방과 투쟁을 계속하는 참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역사를 빼앗긴다는 것이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히는 줄을 현실을 통하여 절실하게 통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다시 또 역사를 빼앗기는 일을 당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 할 때이다. 경제적인 어려움만이 어려움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은 역사를 왜곡당하고 빼앗기는 시련이다. 역사를 잃어버리고 나면 ‘나’ 혹은 ‘우리’라고 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정치’, ‘우리 경제’, ‘우리 문화’라는 말이 더 이상 존재해야 할 공간도 없어지고 이유도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광개토대왕비를 구해내야 한다.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한․일간에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는 독도 문제에서 보듯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손을 놓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혹자는 “모든 역사는 승자(勝者)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다. 일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변조함으로써 광개토대왕과 그 비를 처참하게 죽이고 말았다. 이제 광개토대왕비를 살려내어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광개토대왕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세월 속에 묻혀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우리는 거족적으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획일화된 ‘국민교육’을 부활하자거나 그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민족만 보고 세계는 보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보아야 할 것, 알아야할 것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자는 얘기다. 역사에 관한 한 ‘국민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 수상은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 왜곡 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라고 역사 교육을 강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일제가, 그리고 현재의 일본 사학계가 여전히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기록이라며 제시하고 있는 기록의 일부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비문을 변조하고 변조된 비문을 토대로 유포한 날조의 기록이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게 교활하게 비문을 변조할 줄을. 그러나 일본은 변조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은폐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사학계는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이 싸움이니 100년이 넘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비 비문 변조에 얽힌 이 역사의 전쟁을 일러 흔히 ‘100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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